-하늘의 시선
“조난 당했다!”
“그건 좋아할 일은 아닌 것 같아 오빠..”
하늘이 높디 높은 가을의 어느 날 나랑 미래는 단풍놀이 하러 온 산 속에서 조난당했다. 뭐, 왠지 당연히 이럴 것 같아서 조난당할 것에 철처하게 대비하고 이것 저것 준비 해 와서 한 2~3일은 든든할 것 같지만 아무튼 또 조난당한 것이다!
“사실 이렇게 되는 걸 굉장히 바랬던 눈치다?”
“뭐 늘상 있는 일이니깐 그러니 느긋하게 텐트나 치고 여기서 쉴까?”
“...진짜 태평하다 오빠.”
조난당한 곳은 높은 산의 인적이라곤 전혀 없는 숲 한가운데로 지금 우리가 서있는 공간이 그나마 넓은 편이다. 주변엔 사방엔 나무만이 널려있고 하늘은 정말 푸르고 아름답다. 왼쪽으로는 맑은 계곡이 흐르고 있다. 조난당한 장소긴 하지만 의외로 캠핑하기엔 적당한 장소로 왠지 2~3일 정도는 여기서 지내고 싶단 생각도 든다.
“그럼 우선 텐트 조립부터.”
등에 있는 텐트를 적절히 조립하여-군대에서 배운 스킬로-설치한 다음 적당한 장소에서 불을 피운다.
“...하아.. 그래서 조난 신호는 보냈어?”
“뭐 일단은, 하지만 구조대가 도착할 때까지 하루 이상은 걸릴 테니 너무 걱정하지는 말도록 해.”
“.....”
미래는 뭔가 말하려다가 할 말을 잃은 듯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단념한 표정으로 나뭇가지를 줍기 시작했다.
“뭐 별일은 없을꺼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먹을거랑 물은..”
“충분해.”
자랑스럽게 가방 가득 들어있는 즉석 식품과 대량의 물이 들어있는 pt병을 쏟아 붓는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이 정도면 3일은 문제 없음! 이란 느낌이다.
“우리 조난 당한거 맞지 그런거지? 캠핑하러 온거 아닌거지 응?!”
미래가 심각한 표정으로 내 어깨를 부여잡고 흔든다.
“아..아파, 조난 당한거 맞다니깐? 정 못미더우면 혼자서 내려가도 돼.”
“............................................하아..”
미래는 길게 한숨을 쉬고는 과자 봉지를 집더니 신경질적으로 으적으적 씹어먹기 시작했다.
뭐 그래서 우리의 조난 일기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미래의 시선
아무리 재난에 자주 휘말리는 타입이라지만, 이쯤 되면 그냥 받아들이는 편이 되어 버린다. 뭐 평범하게 단풍놀이를 하다가 조난 당할 정도면 나나 하늘 오빠나 얼마나 부주의한지 명백히 들어난다.
물론, 이 상태를 미리 앞서 예상한 오빠는 어떤 의미에선 초월적인 경지이지만.. 그럴거면 처음부터 조난을 안당하게 주의 해달라고..
"일단 그럼 배도 고프니 그 가져온 즉석 카레라도 만들자."
"밥도 있고 빵도 있는데 어느 쪽을 선호해?"
"음.. 밥.."
뭐, 이러고 있는 나도 굉장히 태평하다고 생각하지만. 물은 옆의 계곡에서 퍼오고 즉석 카레를 뜯어서 몇 번 휘휘 젓다보니 제법 그럴듯한 냄새가 풍겨오기 시작했다.
밥 역시 즉석으로 예의 엄마가 해주신 맛이 난다는 그 제품을 그냥 물에다가 보글보글 끓인다. 전자레인지가 없을 땐 이렇게 조리하면 그릇이 좀 뜨겁긴하지만 충분히 먹을 수 있다는 말씀.
"...근데 이러니깐 진짜로 캠프 하는 것 같아.. 우리 정말 조난 당한거지? 그렇다고 해줘.."
왠지 한심해져서 한숨을 푹 내쉬며 내가 말하자.
"뭐, 상관없지 않아? 난 가끔 미래랑 이렇게 밖에서 생활 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그야 뭐.. 난 딱히 그런게 싫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우리 둘 다 너무 긴장감이 없는거 아닌가 싶기도 해서.."
어쨌든 첩첩 산중이다. 아무리 구조 신호를 보내고 있다지만, 구조대가 우릴 발견 하는 데에는 꽤 시간이 걸릴 것이다. 뭐 생각해 보면 떨어지는 낙엽을 쫒아서 이리저리 뛰어다닌 내가 바보 같긴 하지만..
“그건 그렇고 이쁘다.. 진짜로.”
“그러게.”
뉘엿 뉘엿 넘어가는 석양 사이로 조금씩 낙엽이 떨어져 간다. 빨갛고 노랗고.. 여러 가지 색의 낙엽이 떨어지는 것이 너무나도 아름답다.
오빠와 함께 저녁으로 카레를 만들어 먹고는 배가 불러오자 나는 포만감을 느끼며 바닥에 벌렁 누워서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아~ 행복 하다아~.”
스스로 말해놓고도 바보 같지만, 그래도 사실이다. 조난을 당해서 딱히 괴로운 것도 아니고 여기엔 당분간 아무도 찾아올 일이 없다.
아무도 없는 둘 만의 장소.
부끄럽지만, 나 자신의 로망이랄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이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게 너무너무 행복하다.
-하늘의 시선
대충 식사의 뒷 정리가 끝나고 나서 나는 아무렇게나 누워 있는 미래 옆에 같이 눕는다.
팔을 벌리고 큰 대자로 누워있는 미래의 손을 꼭 잡아본다.
“오빠.”
“응?”
“오빠는 나랑 함께 있어서 행복해?”
“응.”
“왜?”
미래가 고개를 살짝 돌려서 나를 바라본다.
“우리 집 부모님이 돌아가신건 알고 있지?”
“응..”
미래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진다. 하지만 난 미래의 손을 꼭 잡고 말을 이어간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한 동안 내 주변엔 아무 것도 없었어. 다른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가깝게 지내는 친구들도 다 군대 제대 직 후라서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고.. 아무튼 철처하게 나 혼자였어.”
“...”
“자고 일어나면 넓은 집에 아무도 없는거야. 공부하라고 잔소리하시던 어머니도.. 저 녀석 누가 데려가냐고 걱정하시던 아버지도.. 전부다.”
눈을 감고 그 때의 일을 조금씩 회상해본다. 지금은 조금 덜하지만 아직도 가슴 한 구석이 마구 쓰라려오는 괴로운 기억.
“아무리 울고 괴로워해도 더 이상 야단칠 사람도 위로해줄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정말 살고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살아보기로 했었어. 분명 부모님도 내가 이런 모습을 보고싶어 하지 않을거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대학 OT라도 가서 신입생들하고 알고 지내면 훨씬 즐겁게 생활 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조금 슬픈 표정으로 나를 처다보는 미래를 향해 웃으면서 말한다.
“널 만난거야.”
“아..”
“그 다음은.. 너도 알다시피. 하지만 지금 와서 왜 그랬냐고 변명하자면, 너를 놓치고 싶지 않았어. 내 강제든 뭐든 좋으니 너를 붙잡고 싶었는데 어떻게 해야힐지 모르겠는거야. 그래서 그런 짓을 저질러 버렸는데도.. 너는 나한테서 떠나지 않았어. 그리고 그때 결심 한거야.”
“뭘?”
“이 사람은 목숨걸고 놓지 않겠다고.”
“으...”
미래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해서 그 후에도 몇 번 회의가 들긴했어. 나는 내가 살아가는데 널 필요로했지만, 너는 과연 날 필요로 하고 있는지. 사실은 이제 너가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 주제에 강해 보일려고 굉장히 많이 노력했어. 나는.. 어떻게든 너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으니깐..”
그 다음 더 해야 할 말을 찾지 못해서 가만히 미래의 손을 꼭 잡은 채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미 해는 완전히 저물고 구름 한점 없는 맑은 밤하늘 가득 별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미래는 그 밤 하늘을 한참 처다 보더니 조용히 말을 시작했다.
-미래의 시선
“아마도 나는 오빠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해.”
“왜?”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준 건 오빠가 처음이니깐.”
가슴 속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나도 꺼내본다.
“두려웠어, 정신 차려보니 나는 어느새 혼자서 살아가고 있었어, 다들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면서 의지하고 의지가 되주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어느 순간 내 주변엔 아무도 없단걸 깨달았어.”
“민우라던가.. 에르라던가, 부모님이 계시잖아.”
“그 사람들은 가족이니깐, 나는 가족 외에 다른 사람한테 직접 나서서 마음을 열어본적 따위 한 번도 없었어. 그런건 필요 없다고 생각해왔으니깐, 하지만 그게 아니 였던거야. 이 넓은 세상에 혼자서 필요한 사람에게만 마음을 여는 척하고 한번도 진심으로 사람을 상대해본 일따위 없는 나는.. 그저 어린애 였다고 생각해.”
깊게 한숨을 쉬고는 말을 이여간다.
“나도 무언가 시도해보고 싶었지만, 아무 것도 할 줄 아는게 없었어. 내가 가만히 있으면 사람들은 나의 능력이나 성적을 보고 다가오고 그걸로만 평가 받았을 뿐이니깐, 제대로 된 친구 하나 사귀는 법 조차도 배우지 못한.. 그리고 그런 주제에 매일 투정만 부리는 어린애에 지나지 않았던거야.”
“...”
“계기가 필요했어, 하지만 아무도 주변에서 도와줄 사람이 없단 것도 알았고, 나 혼자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결국 나는 아무 것도 못한 채로 그저 자기 자신을 점점 더 궁지에 몰아넣고 있었어. 정말로 괴로워 진다면 스스로 움직일꺼라 생각하고 가장 곁에서 많이 사랑해주는 가족 곁에서 떠나서 홀로 지냈어.. 그치만 사실은..”
“사실은?”
“외로웠어, 외롭고 힘들었지만 이제는 곁에서 있어줄 가족 조차 없다는 사실이 괴로웠어. 결국 난 고집만 부리고 결국 어린애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오빠가 다가와준거야.”
“헤에..”
“처음엔 깊게 생각하지 않았어, 사귀기로 했다고 해도 잘 실감도 나지 않고 연인이라기 보다는 그냥 친한 친구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으니깐. 하지만 오빠가 필사적으로 별로 그렇게 까지 해줘야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 나를 위해서 몇 번이나 몸을 던지고 내가 몇 변이나 투정 부리는걸 받아주는걸 보면서 점점 마음이 바뀌기 시작 한거야.”
“어떻게.. 말이야?”
“이 사람이라면 믿어도 되겠다.. 라고 물론 그렇다고 하루 아침에 오빠를 좋아하게 된건 아니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조금씩 가슴 속에 비어있던 공간이 차오르는게 느껴졌어. 뭐라고 해야할까, 음.. 아마 따뜻함? 그런 느낌이였다고 생각하지만.. 말로는 잘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감정. 그리고 그런 기분이 들게 해주는 사람은 오빠 였던거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난 오빠가 잡아준 덕에 지금처럼 웃으면서 지낼 수 있게 됬어. 그리고 더 이상 조바심을 내면서 어른이 되려고 노력하기 보단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부터 찾아갈 수 있게 됬어.”
“그렇구나..”
“그래서.. 난 오빠가 필요해. 여기까지 날 이끌어 주기도 했고.. 그렇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법도 배웠으니깐.”
“하하하.. 너도 나도 참 많이 변했어.”
“응..”
“하지만 결론은 우리 둘 다 변할 수 있어서 행복 한거지?”
오빠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를 바라보며 웃어보인다.
“응!”
나도 역시 환한 미소로 답해본다.
-하늘의 시선
그렇게 미래와 함께 모닥불 앞에서 밤 하늘을 바라보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이라던가, 납치 당했을 때의 일이라던가. 하나같이 터무니없는 사건들이지만, 그래도 그런 것도 추억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몇 개월 전이라면 이렇게 미래와 함께 웃으면서 이야기 할 날이 오리라곤 생각도 못했지만, 그래도 어쨌든 지금은 함께 할 수 있는게 행복하다.
“그럼 먼저 들어가서 잘테니깐. 좀 더 있다 잘래?”
모닥불 앞에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졸음이 몰려와서 잠이나 자야겠다고 생각한다.
“응, 조금만 더 있다가 들어갈게.”
미래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바이바이 하고 인사를 하고 텐트 안에 들어가서 침낭을 꺼낸다.
바닥이 영 불편하지만, 뭐 이 정도면 자는덴 지장이 없겠다 싶어서 일단 누워버린다.
잠이 막 쏟아진다.
갑자기 아래쪽에 무언가 체중이 느껴진다. 뭔가 강하게 조여오는듯 한 느낌이 몰려들어서 아프다.
“으..윽.. 뭐야?”
“하..하읏... 오빠.. 깼어?”
중압감의 정체는 미래로 옷을 반쯤 벗은 채로 내 위에 올라 타있다.
“뭐..뭐하는거야.”
“오빠를 덮치고.. 하아.. 있는데..”
미래가 더욱 격렬하게 허리를 흔들며 말한다.
“어..어이.. 그만해..”
“그치만.. 추운거얼.. 하으..응..”
일단 몸을 일으키려고 하지만 미래가 가슴을 꽉 누르고 있어서 일어날 수가 없다.
“체온 저하라던가.. 응급 상황도.. 아니잖아... 크읏...”
“하지만.. 마음은.. 응급 상황 인거얼...”
그렇게 말하고는 비겁하게 나에게 키스해온다.
“하아, 진짜로.. 나한테 매일 변태 변태 그러더니 너도 변태잖아 이 바보야..”
“에..헤헷.. 어쩔 수 없네요. 이런 나를 사랑한다고 한건 오빠니깐?”
그렇게 우리는 밤새 몸을 섞었다. 덕분에 다음날 구조대가 도착했을 땐 완전히 녹초가 되어서 둘다 들 것에 실려갔지만.. 뭐 그건 그거대로 싫지 않았던 것 같다.
이런 바보같은 관계라도 좋다.
부디 앞으로도 아무 일 없이 이 아이와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나는 진심으로 생각했다.